▲ 1988년 13대 초선 국회의원 이해찬 (출처=이해찬 블로그)
몇 해 전, 모 단체가 주최한 행사에 연사로 초청된 적이 있었다. 옆자리에 메인 연사로 앉아 계신 전 민주당 대표 이해찬 의원에게 가볍게 인사를 드리면서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그분에게서 고 김홍일 의원, 고 김근태 의원의 만년(晩年)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1974년 3월 말부터 4월 초 사이, 유인태, 김병곤, 나병식, 서중석 등 서울 지역 대학생들은 4월 3일에 연합 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우고 「민중·민족·민주 선언」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만들었다. 당일 서울대, 고려대, 성균관대 등 10여 개 대학 학생들이 시가 행진을 시도하자 당국은 이를 ‘공산 폭동’으로 규정했고, 시위의 배후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불법 조직이 있다고 발표했다. 박정희는 이 시위를 빌미로 긴급조치 제4호를 공포했다. 하지만 시위를 주도한 대학생들이 조직을 만든 적은 없었고, ‘민청학련’이라는 이름도 중앙정보부에서 마음대로 붙인 것이었다.
‘민청학련’이라는 가상의 조직을 먼저 만들어낸 당국은 시위 관련자들을 체포해 혹독하게 고문함으로써 이를 실체화했다. 구속자의 가족들까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야만적인 고문을 당했다. 이해찬도 이때 잡혀가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손 떨림 증세가 생겼다.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민청학련의 정부 전복 및 국가 변란 기도 사건의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법 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산당원,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또는 ‘제2차 인혁당 사건’이다.
중앙정보부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함으로써 대학생들의 반(反)유신 시위와 재야 인사들의 반(反)유신 활동을 ‘북한의 지시에 따른 체제 전복 활동’으로 몰았다. 검찰과 법원도 이에 동조했다. 7월 13일 비상보통군법회의 제1심 판부는 도예종, 서도원 등 인혁당 관련자 8명과 이철, 유인태, 나병식 등 민청학련 관련자 7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8월 15일에는 이해찬도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4월 9일, 대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의 상고를 기각했고, 정부는 그로부터 20시간도 안 되어 형을 집행했다. 국제법학자협회가 ‘세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명명한 ‘사법 살인’이다.
유신헌법을 비판하기만 해도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사법 살인’을 당할 수 있었던 시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를 부끄럽게 만드는 야만적 독재의 시대에, 정권이 ‘반국가 사범’으로 낙인찍은 사람들의 별명은 ‘양심범’ 또는 ‘양심수’였다. 유신헌법은 민주주의만 압살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양심까지 압살했다. 경찰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죄 없는 사람인 줄 알면서도 잡아다가 잔인하게 고문해 사건을 조작했고, 검사들은 고문 피해를 호소하는 피고인들을 기소했으며, 판사들도 죄 없는 사람들에게 사형 등 중형을 선고했다. ‘공권력’의 집행자들은 양심 있는 인간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짓들을 태연히 자행했다.
수백 명이 가두시위를 벌인다고 해서 박정희 독재 정권이 당장 붕괴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대학생들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은 당장의 안전을 위한 침묵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양심이 짓밟히고 실종된 시대에, 아직 ‘양심’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 독재자와 그 협력자들이 자기들의 이익만을 위해 만들어 놓은 ‘실정법’이라는 허울 위에, ‘보편적 인간성’에 기초한 자연법=양심법이 있음을 선언하고자 했다. 그들이 양심범이었고,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양심세력’이었으며, 양심세력이 자기 뜻을 밝히는 방법이 ‘양심 고백’ 또는 ‘양심 선언’이었다. 민주화운동은 곧 ‘양심 회복 운동’이자 ‘인간성 수호 운동’이었다.
‘인혁당 사법 살인’ 두 달 전에 출소한 이해찬은 이후에도 ‘양심의 명령’을 외면하지 않았다. 1980년 그는 다시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고 기소됐다. 법원은 이때에도 그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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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통련 활동시절의 이해찬 (출처=이해찬 블로그) |
나는 이해찬 선생과 대학 졸업 동기다. 그는 1971년 서울대 화공과에 입학했다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다시 시험을 쳐 이듬해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입학했다. 민청학련과 김대중 내란음모라는 두 차례 조작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에도 그는 1983년 김근태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했고, 1984년 복학해 1985년 졸업했다. 졸업 후 신림동에 광장서적이라는 서점을 냈고, 이어 돌베개 출판사를 차렸는데, 모두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일깨우기 위한 활동이었다. 대학원생 시절, 나는 책을 살 일이 있을 때면 으레 광장서적으로 갔다. 서점 주인과 고객 사이의 의례적인 대화밖에는 나눈 바 없으나, 내 기억 속에는 그의 옹골차고 다부진 면모가 단단히 자리 잡았다. 그런데 40여 년 만에 다시 본 그는 무너져 가는 모습이었다. 젊은 시절 겪은 고문 후유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찬 선생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이 그에게 ‘민주화운동가’나 ‘민주당의 대부’라는 칭호를 헌정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의 평생을 지탱한 것이 ‘양심’이었다고 본다. 그는 양심에 따라 민주화운동에 참가했고, 양심에 따라 전두환을 꾸짖었으며, 양심에 따라 ‘차떼기당’을 규탄했다. 그는 민주화운동가나 민주당 정치인이기 이전에 ‘양심세력’의 선봉이었고,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 타인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평생을 바친 ‘양심인’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라는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인간성 수호의 모범’이었다.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ICE 대원들이 무고한 시민을 총으로 쏴 죽이는 사건이 두 차례나 일어났다. 미국 대통령과 정부 고위직 인사들은 피살자들에게 테러리스트라는 누명을 씌우고 살인자들을 두둔하고 있다. ICE 대원들의 살인 장면이 담긴 영상물이 전 세계인에게 공개됐는데도, 그들은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던 1987년 한국 경찰의 거짓말보다 훨씬 심하다. 그런데도 미국 국민 일부가 살인자들에게 보낸 ‘기부금’이 100만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인간의 양심이 이토록 빠르게 무너진 적이 있었는가 싶다. 이런 때일수록 이해찬 선생과 그 동료들이 벌였던 ‘양심 회복 운동’과 ‘인간성 수호 운동’을 기억해야 한다.
고 이해찬 선생이 편히 쉬시길 빈다. 더불어 과거 고문을 지시하고 실행했던 자들, 고문 피해자들을 기소했던 자들, 그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던 자들의 양심이 깨어나길 빈다. ‘민주화’는 인간의 양심을 지키고 일깨우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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