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막는 권력에서 AI 시대까지…‘질문할 권리’가 민주주의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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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암살자(들)' 속 장면 (사진=연합뉴스) |
빤한 영화일 수 있다. 새삼 ‘기러기’라 불리는 기자들이 정의의 사도가 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독재 정권 시기에 진실을 가리는 자들에게 맞서 정론직필의 저널리즘을 보여주는 콘셉트는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준다.
영화 ‘암살자(들)’은 OTT에 흔한 청부살인 소재의 스릴러물을 연상할 수 있지만, 실제 사건의 본질과 범인을 파헤치는 미스터리 추적물이다. 그 현장을 추적하는 주체는 기자만이 아니라 경찰관도 있다. 일선 현장에서 억울한 책임을 지게 된 경찰관의 분투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기자는 진실을 추적해 보도하고 경찰관은 진범을 잡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다. 이들은 그러한 자신의 일, 소명과 역할에 충실하다.
그들의 분투는 사실 소명의식이라기보다는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 것이다. 의문이었고, 그 의문에 따라 질문을 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이창동 감독이 ‘가능한 사랑’에서 관객들과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듯 이 영화도 답을 정하지 않고 내내 질문을 할 뿐이다.
하지만 영화 ‘암살자(들)’에서 기자와 경찰관은 자신의 소명을 실현할 수 없다.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벌어진 문세광의 육영수 저격 암살 사건이라는 실제 역사적 소재를 다뤘기 때문에 그 핍진성은 애초에 전제할 수 있었다.
영화의 시작은 의문과 물음에서 비롯한다. 당시 문세광이 쏜 총알은 4발인데 현장에 남아 있는 총탄 흔적은 6발이다. 2발은 다른 누군가가 저격했다는 합리적인 의심에 기반을 둔다.
무엇보다 경찰관은 분명 행사장에서 의심스러운 인물을 제지했지만 청와대 경호 담당은 통과시켰다. 그것도 강압적인 방식으로 애초의 기본 원칙을 어기는 조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관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켰다.
검사는 자신이 범인을 조사해 모든 것을 밝혔다고 과시한다. 이미 중앙정보부가 범인의 정보를 밝힌 하루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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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년 8월19일 박정희 대통령 배우자 육영수 여사의 유해가 청와대 정문을 나오고 있다. (출처=대통령경호처) |
더구나 저격 현장에서 범인이 제압당하고 나서도 총성이 울렸다. 범인이 이미 제압됐다면 총격을 가할 이유가 없으며 경호원 그 누구도 총알을 발사한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육영수 여사를 관통한 총알을 중앙정보부는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간단히 그 총알을 공개하면 될 일이었다.
이러한 점은 기자들의 의문과 같았다. 육영수 여사를 관통한 총알은 범인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가 저격한 것으로 충분히 의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암살자는 한 명이 아니라 다른 공범이 있다는 잠정적인 결론에 이르고, 그 누군가를 실제로 특정해 추적과 추격에 나선다.
이는 발로 뛰는 현장에 기자와 경찰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들은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확인했기에 공식적인 발표와 다른 사실들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해 질문을 시작하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정권과 정보부는 피했고, 억압했고, 통제했다. 160명의 기자들은 해직됐고 경찰관 28명은 파면됐다. 더구나 경찰관 28명은 세월이 지나고 정권이 바뀌었어도 끝내 복귀하지 못했다.
독재 정권 시기 모든 기자들이 다 정론직필하지 않았듯이 모든 경찰이 다 진범을 체포하기 위해 분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진실 보도를 위해 저널리즘 정신을 발휘한 기자들이 있었고, 진범을 잡기 위해 분투한 경찰들이 있었다.
독재 정권 시기 모든 경찰이 정권의 시녀가 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의문을 품고 질문했던 이들은 있었을 것이고,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공공성을 담보하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역사를 다시 되짚고 선의를 독려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현장에서 피와 땀으로 뛰는 이들이 목도한 경험과 진실에 기반을 둘 때 왜곡과 조작은 힘을 잃는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최종 범인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수사 결과 발표다. 이 발표는 기자들 앞에서 이뤄졌고, 동성일보 사회부장 김재환(박해일)은 조목조목 의문을 제기하고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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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살자(들)' 레트로 스틸 컷 |
숨기는 자가 범인이라는 말이 있지만, 질문에 답하지 않는 자들이 범인일 수밖에 없다.
언론이야말로 질문을 하는 것이 기본적인 특징이고 경찰관도 질문을 통해 진범을 가려낸다.
인간만이 질문을 할 수 있다. AI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묻는 질문에 답을 할 뿐이다. 스스로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현상을 만들어내며 진실인지 가짜인지에도 관심 없이 그저 말을 뱉어낼 뿐, 이에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할 뿐만 아니라 관심이 없다. 인공지능이 진실에 관심이 없는 것은 부족이나 결핍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한계와 미흡함을 느끼고 이를 보완하고 개선하려 한다. 이를 위해 질문을 통해 인간은 생존을 모색해 왔고, 인류는 문명은 물론 민주주의를 완성해 왔다.
가장 인간다움이란 단지 생각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스스로 묻고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오답과 왜곡을 고치고 바로잡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물론 스스로 질문하지 않고 질문을 던지지 않는 권력과 조직은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 AI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질문하는 인간이 없다면 AI조차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다.
질문하는 인간을 철학자 게오르크 슈타이너(George Steiner)는 ‘호모 콰렌스(Homo quaerens)’라고 했다.
사법부의 재판 결과에 대해서도 합리적 의구심을 갖고 질문해야 피해자 인권 보호는 물론 사회 정의가 제대로 정립될 수 있다. 판사의 사법적 재단으로 진리와 진실이 오로지 완결될 수 없다.
대통령의 결정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국민들이 투표로 선출한 대통령은 유권자 앞에 약속한 공약을 반드시 지켜야 하며, 이러한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때 국민은 의구심을 갖고 질문해야 한다.
당연히 민주공화국의 국민주권주의에 따라 대통령도 이에 대답해야 한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자, 그 자가 범인이라는 점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무엇에 대해 어떻게 질문을 던질 것인가는 인간다움이요, 민주주의 그 자체다. 그것이 막히는 순간 인류는 쇠망의 길에 들어선다.
민주공화국의 앞날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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