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 박사
sstpnews@gmail.com | 2024-01-31 10:00:49
원(怨)은 상대에게 되돌려줄 수 있거나 되돌려주어야 마땅한 억울함이다. 그래서 ‘원수를 갚는다’고 한다. 원수 갚는 것은 채무 관계를 해소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반면 한(恨)은 되돌려줄 수 없는 억울함을 뜻한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것도 억울한 일이고, 장애를 안고 태어난 것도 억울한 일이다. 그렇다고 사람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神)이나 부모에게 보복할 수는 없다.
이런 억울함은 스스로 ‘해소(解消)’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은 ‘푼다’고 한다.
국가는 발생 당초부터 ‘복수 대행 기관’을 자임했다.
인류 최고(最古)의 법전으로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원칙에 따른 ‘복수’를 형법의 기초로 삼았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조선의 팔조법금 중 첫째 조항도 ‘사람을 죽인 자는 바로 죽인다’이다.
국가의 역할 중 하나는 공동체 구성원이 당한 억울함을 대신 갚아주는 것이었다.
시대에 따라, 또는 문화권에 따라 국가가 ‘사적 복수’를 허용하거나 묵인하는 경우도 있었고, 부모의 원수에게 ‘복수(復讐)’하는 것을 자식의 의무로 부과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근대 국민국가는 ‘복수할 권리’를 독점하고 개인의 ‘사적 복수’를 엄금했다. 이로써 셰익스피어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것과 같은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가문 간의 연쇄 보복은 사라졌으나, 대신 국가 사법(司法)의 공평성과 엄정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높아졌다.
자식이 부모에게 보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민이 국가에게 보복할 수도 없다.
국가의 일부인 사법기관이 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뒤바꾸거나 범죄자를 비호하고 피해자에게 2중 3중의 추가 피해를 강요하더라도, 개인의 힘으로 국가에 맞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국가로부터 당한 억울함도 ‘한’이 된다.
요즘에도 판사에게 석궁(石弓)을 쏘거나 정부 기관 건물을 자동차로 들이받는 등 ‘자해적 복수’를 결행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이들은 대개 ‘분노조절 장애’ 등을 가진 정신이상자로 취급된다.
‘복수 대행 기관’인 국가가 정당한 복수를 기피하거나 거부하고, 심지어는 가해자의 편이 되어 피해자를 억압할 때, 피해자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한을 풀거나 ‘한 맺힌 귀신’이 되는 것밖에 없다.
또 다른 방도가 있다면, 그것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힘을 모아 포악하고 불공정한 국가에 저항하는 것이다.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중세 국가의 권력자들도 이런 원리를 모르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역병(疫病)이 돌거나 홍수, 한발 등의 자연재해가 닥치면, 국가 차원에서 ‘여제(厲祭)’를 지냈다. ‘여제’란 ‘여귀(厲鬼)’에게 지내는 제사를 말하며, 여귀란 ‘억울하게 죽은 귀신’ 또는 ‘한을 품고 죽은 귀신’을 뜻한다.
억울한 피해자의 응어리진 한이 쌓이면 국가가 위험해진다는 것은 중세의 권력자들에게도 ‘상식’이었다. 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뒤바꾸지 않는 것,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 나중에라도 피해자의 억울함이 밝혀지면 그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 국가의 기본 책무였다.
근대 국민국가는 ‘사적 폭력’과 ‘사적 보복’을 엄금하는 만큼, 이 기본 책무에 대한 성실성을 스스로 입증해야 했다.
더구나 근대 국민국가는 ‘신(神)의 소관’이던 일 상당 부분을 자기 일로 전환시켰다.
과학 기술의 발달, 재원(財源)의 증대, 행정 체계의 정비와 행정 인력의 증가 등에 힘입어 근대 국민국가들은 중세의 신도 못 하던 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옛사람들은 재난을 당하면 하늘을 원망했지만, 현대인들은 국가를 원망한다. 홍수가 나도 정부에 책임을 묻고 전염병이 돌아도 정부 탓을 하는 것은 현대인의 권리다.
그런 일을 사전에 방지하거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인적(人的), 물적(物的), 지적(知的) 자원을 다 가진 것은 정부뿐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를 통과한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취임 2년도 안 되어 벌써 9개의 법률을 휴지통에 넣은 것이다.
의회민주주의 원칙을 거듭 짓밟은 행태도 문제지만,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이 내놓은 ‘거부의 변’은 상식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은 이 법안이 ‘정쟁을 심화하고 사회통합을 저해한다’고 주장한다.
일하다가 놀고 직장에 갔다가 사람 많은 곳에 갔다가 하는 것은 태곳적부터 형성된 인간의 습성이다. 일과 놀이가 결합되는 것이 인간의 ‘평범한 일상’이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은 무언가를 잘못해서 죽은 게 아니다.
그들은 그저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가 도로 관리와 행인 통제권을 정부가 자기 책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된 것이다. 그런데도 이 정부는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지우고 애초에 없었던 존재인 것처럼 취급해 저세상으로 떠나보냈다.
참사 후 1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정부를 대표해 책임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자식들을 ‘억울한 희생자’로 만들 수는 없다는 유가족들의 뜻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다.
어디에 정쟁이 있고, 어디에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요소가 있다는 말인가? 억울한 희생자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건 옛날 사람들도 아는 바였다.
물론 ‘사람 많이 모이는 데 놀러 간 게 잘못’이라며, 희생자와 유족들을 비난하는 자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현대는 홍수 때 자동차가 침수되는 일에 대해서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등 ‘관리 책임’을 진 기관에 책임을 묻는 게 당연한 시대다.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도 개인과 가족 단위의 모든 재난을 ‘운명’이나 ‘하늘’ 탓으로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자들이야말로 참사를 정쟁의 소재로 이용하는 자들이며,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기 인간성이 손상(損傷)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자들이다.
공동체 구성원의 억울한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 게 인간의 기본 속성이다.
인간성은 야수성(野獸性)과 통합해서는 안 된다. 야수 같은 것들의 주장을 인간의 호소(呼訴)와 똑같이 취급하면 인간성은 야수성 쪽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
경제난을 초래하는 경제정책이나 안보 위기를 심화하는 외교정책은 오히려 작은 문제다. 인간성과 야수성을 동렬에 놓고 서로 싸움 붙이려 드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짐승처럼 사는 걸 ‘정상’으로 여기는 사회는 인간의 사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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