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위원
sstpnews@gmail.com | 2025-10-26 09:00:54
일제 강점기에 친일 세력이 후대를 받았다고 해서 일제 시대가 좋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폭군이라도 한두 가지는 잘한 일이 있다. 박정희 역시 폭정만 한 것은 아니다. 때때로 옳은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4·19 혁명정부를 뒤엎은 쿠데타를 ‘잘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제가 조선을 침탈한 것이나, 박정희가 혁명정부를 전복한 것은 모두 불의한 일이다.
1979년 10월 26일, 오늘은 박정희가 당시 중앙정보부장(현 국정원) 김재규의 총탄에 생을 마감한 지 46년이 되는 날이다. 박정희는 4·19 혁명정부를 무너뜨린 반역자다. 반역자가 몇 가지 성과를 남겼다고 해서 그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독재자에게도 공과가 있다”는 말은 “일제에도 좋은 점이 있었다”, “히틀러에게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는 궤변과 다르지 않다.
독일에서는 그런 발언이 법적으로 처벌 대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일제 강점기를 그리워하고, 독재자를 미화하는 이들이 있다. 일제나 유신정권에 은혜를 입은 이들은 부끄러워해야 마땅하지만, 오히려 그 시절을 찬양하며 큰소리치는 사람들까지 있다.
박정희가 ‘경제를 살린 대통령’이라고?
박정희는 재임 기간 중 “경부고속도로 건설, 수출 증대, 국민소득 향상, 저축 장려 등으로 한국의 경제적 자립을 이뤘다”며 추켜세워진다.
하지만 그의 정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속내가 따로 있었다. 예컨대, 남북관계를 ‘7·4 남북공동성명’을 통해 처음으로 화해의 시대로 열었다고 평가하지만, 그것은 유신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통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행위였음을 사가들이 밝히고 있다.
또한 한일 국교 정상화를 ‘관계 개선’이라 포장했지만, 박정희는 반대하는 국민들을 비상계엄으로 진압하고, 식민지의 상처를 ‘무상 3억 달러’와 맞바꾼 굴욕적 합의를 강행했다.
46년 전 그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유신헌법을 제정, 종신대통령을 꿈꾸다 부하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가 집권한 18년은 민주주의가 짓밟힌 공포의 시대였다. 5·16은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였고, ‘한국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포장한 대국민 사기였다.
박정희는 ‘반공’과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양심적인 인사들을 탄압하고 수많은 애국자를 희생시켰다. 그는 경제를 살린다며 대미 종속적 구조를 만들고, 재벌을 키워 서민 경제를 파탄 냈다. 오늘날의 양극화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 구조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8항은 “이를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못박았다.
정당 이름조차 ‘민주공화당’이라 포장한 것도 기만이었다. 박정희는 4·19 혁명으로 세워진 제2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체제로 바꾸더니 세 차례 헌법을 개정해 결국 유신헌법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대통령은 국민이 아닌 ‘통일주체국민회’가 선출하는 반민주적 체제로 전락했다.
또 제9조 1항에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적혀 있었지만, 박정희는 재벌을 특혜로 키워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대미·대일 종속적 경제구조를 만들었다.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졌지만, 그가 남긴 ‘유신의 유산’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 ‘혁명공약’, ‘국민교육헌장’, ‘한국적 민주주의’, ‘반공교육’은 유신의 이념을 세뇌시켰다.
그 결과, 유권자들은 그의 딸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그의 사진은 여전히 여당 당사에 걸려 있다.
박정희 청산 없이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을까? 10·26 사태 46주년을 맞은 오늘, 우리는 여전히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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