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직후 모습. 대통령 경호실 수행계장 박상범이 권총을 든 채 연단을 호위하고 있다. (사진=자료사진)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도를 넘는 비판과 위협이 이어지는 가운데, 영화에 대한 공격의 근거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장이 있다. 북한이 문세광 사건의 배후임을 이미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주로 제시되는 것이 2002년 당시 방북한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대표에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문세광 사건과 관련해 “하급자들이 관련된 것으로 (나는)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당사자의 기록만으로는 이 발언을 사실로 확인하기 어렵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07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2002년 5월 방북 당시 김정일과 나눈 대화를 기록했지만 문세광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당시 김정일이 사과한 것으로 기록된 사건은 문세광 사건이 아니라 1968년 1·21 사태다.
김정일은 당시 “극단주의자들이 일을 잘못 저질렀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다 응분의 벌을 받았다”는 취지로 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측 역시 김정일에게 어머니 육영수 여사 사건에 대한 사과나 언급을 들은 적이 없다며 관련 보도를 부인한 바 있다.
그렇다면 ‘김정일이 문세광 사건을 인정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2002년 9월 13일 일본 지지통신(時事通信)이 베이징발 익명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일이 문세광 사건에 대해 “하급자들이 관련된 것으로 (나는)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보도한 내용이 국내 언론에 인용됐다.
그러나 현재 해당 보도의 원문을 확인하기는 어렵고, 무엇보다 당시 박근혜 대표 측은 이 같은 내용을 부인했다. 따라서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외신 보도를 반복 인용하면서 이를 ‘김정일이 문세광 사건의 북한 배후를 인정한 증거’라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 ▲ 2012년 8월20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새누리당 제18대 대선 후보자 지명 전당대회’에서 후보자로 공식 지명된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이 지난 2002년 방북, 김정일위원장과 기념촬영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문세광의 배후로 지목됐던 인물에 대해서도 이미 20여 년 전 중요한 증언이 나왔다. 배후 인정 문제 역시 서로 다른 기록과 주장이 뒤섞인 채 반복돼 왔다.
2005년 3월 27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육영수와 문세광’ 제2부 ‘문세광을 이용하라’ 편에서는 당시 수사 발표에서 문세광의 배후 인물로 지목됐던 김호룡의 인터뷰가 방송됐다.
김호룡은 30년 만의 단독 인터뷰에서 문세광과는 골목에서 만나 인사를 하는 정도의 관계였고 돈 한 푼 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 자신이 문세광 사건과 관련해 일본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은 적도 없다고 밝혔다. 당시 일본 수사 관계자 역시 카메라 앞에서 증거가 없어 수사할 내용이 없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1974년 당시 북한 지도부가 문세광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외교문서도 있다.
구동독의 1974년 외교문서를 보면 당시 김일성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성상환 서울대 독어교육과 교수가 독일 외무성 정치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문서에는 김일성이 문세광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담겨 있다.
김일성은 1974년 10월 25일 북한 주재 신임 소련대사 글레브 크리울린과 대화를 나누면서 “테러범 문세광은 아마도 남조선을 지지하는 한인단체인 민단의 좌익에 속한다. 이들은 일본에서 납치된 남조선의 반대파 정치인인 김대중을 추종하는 자들”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이 발언은 같은 달 29일 북한 주재 소련대사관의 피메노프 공사가 평양의 동독대사관을 방문해 프란츠 에버하르츠 동독대사에게 전달하면서 외교문서에 남게 됐다.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됐던 사건 이후 일본 내 김대중 지지세력의 움직임을 김일성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당시 우리 정부의 특별수사본부는 “북한 공작원 문세광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 포섭돼 북측의 지령을 받고 서울에 잠입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발언은 이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그는 북한 배후설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세광을 민단 좌익과 김대중 지지세력에 연결하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이것이 사건의 실제 배후를 입증하는 자료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당시 북한 최고지도부가 이 사건을 공식적으로 어떻게 설명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또 하나 자주 인용되는 것이 미국 정보기관 문서다. 1985년 CIA 동아시아분석실 내부 문건 등에는 문세광이 ‘북한 공작원(North Korean agent)’으로 표현된 자료가 있다. 그러나 해당 자료가 문세광 사건 자체를 CIA가 독립적으로 재조사해 내린 결론인지, 당시 한국 정부와 정보기관 등의 설명을 토대로 국내 정세를 정리한 것인지는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보기관의 문서에 ‘북한 공작원’이라고 적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문서가 곧바로 사건의 배후를 독립적으로 입증한 수사보고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료가 어떤 목적으로 작성됐고, 어떤 정보원을 토대로 작성됐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 | ▲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이었던 이건우가 기존 수사결과와 다른 의혹을 제기한 내용을 다룬 당시 보도. 이건우는 현장의 탄흔과 총탄 등을 근거로 “육 여사는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지 않았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사진=자료화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건 현장에 있었던 실무자의 증언이다.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이었던 이건우는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15년 뒤인 1989년 월간지 ‘다리’와의 인터뷰에서 사건에 관한 다섯 가지 의혹을 제기했다. 이 증언은 이후 2005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누가 육영수를 쏘았는가’ 편에서도 사건의 핵심 의혹을 다루는 중요한 토대가 됐다.
이건우가 제기한 첫 번째 의문은 총탄이었다.
그는 사건 현장에 네 발의 탄흔이 있었지만 탄두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청와대 경호실이 관련 물증을 수거해 갔다고 주장했다. 특히 육영수 여사를 관통한 것으로 알려진 총탄이 공개되지 않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그는 현장의 각도와 탄흔 등을 근거로 문세광이 발사한 총탄이 육영수 여사에게 닿기 어렵다는 취지의 주장도 했다.
문세광이 소지했던 총기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문세광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스미스앤드웨슨 리볼버가 당시 청와대 경호실에서 사용하던 총기와 같은 종류였다는 점을 지적했다.
문세광의 부상 상태 역시 의혹의 대상이었다. 문세광은 첫발을 발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대퇴부를 관통했다고 진술했지만, 이건우는 사건 발생 열흘 뒤 문세광을 만났을 당시 그가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모습을 봤다며 실제 대퇴부 관통상을 입었다면 가능한 모습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문세광이 타고 온 것으로 알려진 검은색 포드 승용차의 차량 번호가 등록돼 있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건우는 결국 육영수 여사를 쏜 범인이 문세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진범을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말할 수 없었다는 취지의 발언과 함께 “그때 내가 이것을 공개했더라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것”이라는 말까지 남겼다. 물론 이것은 이건우 개인의 증언이자 기존 수사결과와 배치되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건 현장 감식을 담당했던 실무자가 이런 구체적인 문제를 제기했다면 그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설명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의문을 제기한 사람을 공격한다고 의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문세광이 별도의 비표 없이 국립극장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던 경위 역시 오랫동안 의혹의 대상이 돼 왔다.
| | ▲ MBC가 문세광 사건 당시 현장에 남은 탄흔의 위치를 방송화면을 통해 분석한 장면. 문세광 허벅지와 연단, 육영수 여사, 태극기, 장동화씨 주변의 탄흔 위치가 표시돼 있다. (사진=MBC 방송화면 갈무리) 또 하나 중요한 증언이 있다.
언론에서 제기돼 온 “문세광이 자백하기도 전인 8월 16일자 조간신문에 이후 수사결과와 동일한 내용이 미리 보도됐다”는 주장과 관련해 김일두 전 수사본부장은 자신이 사건 당일 지방에 있다가 오후 4~5시께 서울로 복귀했기 때문에 즉시 조사해 결과를 발표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취지로 증언한 바 있다.
그는 당시 중앙정보부가 이미 확보하고 있던 정보를 언론이 수사본부 발표인 것처럼 앞서 보도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결국 사건 초기부터 청와대 경호실과 중앙정보부가 어떤 정보를 갖고 있었고, 사건 수사와 증거 관리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여전히 중요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이런 의문들이 영화 ‘암살자(들)’의 주요 골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제기는 영화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비롯해 이후 여러 지상파 프로그램에서도 이미 반복해서 다뤄졌다.
수십 년 동안 제기된 질문에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의혹이 계속됐고, 결국 대중영화의 소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질문에 충분한 답이 있었다면 논쟁도 지금처럼 계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 반세기가 지났다. 이제는 현장의 핵심 의혹에 답할 때도 한참 지났다. 국가가 답하지 않을수록 의혹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폭된다.
그렇다면 영화에 화를 내고 영화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영화가 다시 제기한 질문에 답하면 된다.
문세광이 쏜 총탄이 실제로 육영수 여사를 맞힌 것인지, 당시 현장에서 수거된 탄두는 어디로 갔는지, 왜 핵심 물증에 대한 과학적 감정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는지, 문세광의 부상 상태는 그의 진술과 일치했는지, 국립극장 출입 과정에서 경호상 허점은 왜 발생했는지, 중앙정보부는 공식 수사가 시작되기 전에 어떤 정보를 갖고 있었는지 하나씩 확인하면 된다. 사실이라면 사실이라고 밝히고, 사실이 아니라면 왜 사실이 아닌지를 증거로 설명하면 된다.
그것이 진상조사다.
이제라도 영화 ‘암살자(들)’을 계기로 문세광 사건에 대한 철저하고 완전한 재조사가 필요하다. 오래됐다는 이유로 질문을 덮는 것은 진실을 확인하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오래됐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자료와 기록,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을 최대한 모아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잘못된 주장인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 ▲ 영화 '암살자(들)' 포스터 (사진=연합뉴스) 영화 ‘암살자(들)’을 두고 사자명예훼손죄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형법상 사자명예훼손죄는 공연히 허위사실을 적시해 사자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에 성립하는 범죄다. 또한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친고죄다. 사자의 명예훼손 사건에서는 법이 정한 고소권자의 고소가 필요하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사자명예훼손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에서 제시한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이 사실의 적시인지 창작적 표현인지, 허위사실이라면 이를 어떻게 입증할 것인지 등을 따져야 한다.
2005년 1월 20일 박정희 전 대통령 저격 사건 및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이른바 ‘문세광 사건’ 관련 문서 공개 문제가 논의됐을 당시 비공개로 열린 한나라당 상임운영위원회 회의에서 박근혜 대표는 “박근혜가 누구의 딸이라는 것은 잊어달라”는 취지로 말했다.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주변에서 끊임없이 논란을 만들고 분란을 키우는 것이 과연 고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인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사건에 남아 있는 질문에 답하고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고인의 명예를 지키는 길일 수 있다.진실이 확인되면 의혹은 끝난다. 반대로 질문을 막고 의혹을 제기하는 것 자체를 공격한다면 의혹은 끝나지 않는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필요한 것은 위협도, 낙인도 아니다. 이제는 남아 있는 질문에 국가가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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