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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tpnews@gmail.com | 2025-11-23 18:00:43
1980년 광주항쟁 한 달 전, 강원 정선군 사북읍의 탄광촌에서도 국가폭력이 자행됐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부정선거, 임금 착취에 항의하던 광부들은 당시 계엄당국과 경찰의 강경 진압에 맞섰고, 이후 신군부 합동수사단은 수백 명을 불법 연행해 고문하며 사건을 '폭도 난동'으로 왜곡했다. 45년이 지난 지금, 피해자들은 여전히 "정의는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21일 정선 사북종합복지회관에서 열린 사북민주항쟁 45주년 기념식에는 생존 피해자와 유족, 지역 주민 350여 명이 참석했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영상 메시지에서 "1980년 사북사건은 공권력에 의한 심각한 인권침해"라며 “명예회복과 보상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 고위급이 공개적으로 국가 책임을 인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광부들의 생존권 투쟁
사북사건의 발단은 1979년 노조지부장 부정선거와 임금인상안 왜곡 합의에 대한 분노였다. 노조원들의 직접선거 요구는 경찰과 정보기관의 개입으로 좌절되었고, 임금협상 역시 어용 간부가 일방적으로 회사와 타협했다.
1980년 4월21일, 노조 집회까지 계엄당국에 의해 불허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광부들의 불만은 폭발했다. 현장을 사찰하던 사복경찰이 발각되어 도주하며 광부 3~4명을 차량으로 치고 달아난 사건은 촉매였다. 분노한 광부들은 파출소를 점거하고 사북 일대를 장악하며 결사항전 태세를 갖췄다.
22일에는 안경다리에서 경찰과 광부 간 투석전이 벌어져 경찰 1명이 숨지고 70여 명이 부상했다.
“절대 실력행사 없다”는 약속 뒤의 배신…새벽마다 울린 고문 비명
강원지사 등이 뒤늦게 협상에 나서며 11개 항의 요구안이 받아들여졌고, 광부들은 약속을 믿고 해산했다. 그러나 이는 함정이었다.
5월6일, 신군부 합동수사단은 협상 지도부를 가짜 회의에 불러 소총을 들이대고 체포했다. 이후 200여 명의 주민·광부·부녀자들이 영장 없이 연행됐고 밤마다 고문이 이어졌다.
증언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고춧가루 물고문, 성적 수치심 고문, 임산부 폭행으로 인한 유산, 각목 꿇어앉히기 고문을 겪었다. 마을 공동체는 “누가 누굴 고발했는지”를 강요하는 고문 방식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28명은 군사재판에서 유죄를 받았고, 대부분은 “고문 사실을 말하면 다시 잡아가겠다”는 협박 때문에 수십 년을 침묵했다.
‘폭도’에서 ‘민주화운동’으로…20년에 걸친 진실 규명
사북사건이 국가폭력 사건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이후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2008년 "합동수사단이 불법구금·고문을 저질렀다"고 인정하고 국가 사과와 보상을 권고했다. 이후 재심을 통해 8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2024년에는 2기 진실화해위원회도 같은 결론을 내리며 국가의 공식 사과, 명예회복, 기념사업을 다시 권고했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사과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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