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박사
codesss@naver.com | 2025-11-09 13:00:27
한국 문화유산과 전통 건축을 평가할 때 흔히 간과되는 개념이 있다. 바로 차경(借景)이다. 자연을 건축물 안으로 포용하는 설계 철학으로, 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을 중시하는 전통 건축의 핵심이다.
사당이나 왕릉 같은 공간에서는 탁 트인 경관이 중요하다. 이는 자연과 인간 공간을 조화시키려는 선조들의 지혜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그러나 최근 종묘 앞 세운4구역 재개발 논란에서 서울시, 서울시의회, 대법원의 판단은 이러한 가치를 외면했다. 오세훈 시장은 “40층 건물이 들어서도 그늘이 지지 않으므로 문제 없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그늘이 아니라, 시야와 경관, 차경의 가치다.
서울시의회는 2023년 9월, ‘문화재 반경 100m 밖이라도 영향이 예상되면 인허가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조항을 삭제했다. 이는 오세훈 시장의 재개발 계획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상위법인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무효소송이 제기됐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조례 삭제가 위법하지 않다고 판시했다. 결과적으로 유네스코와 협의 없이 40층 고층 건물 건립이 가능해진 상황이다.
실제로 서울시는 세운4구역 건물 높이를 ‘종로변 55m → 101m, 청계천변 71.9m → 145m’로 완화했다. 종묘 북쪽 180m 지점에 약 40층 건물이 들어서면 시야와 차경이 훼손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1995년 종묘 시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근 고층 건물 건설을 금지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만약 이 권고가 무시됐다면, 종묘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어려웠을 것이다.
해외 사례도 이를 보여준다. 독일 드레스덴 엘베강 계곡과 영국 리버풀 수변구역은 개발로 인해 세계문화유산 목록에서 제외된 바 있다. 유네스코 운영지침에 따르면, 도시 조화 악화, 보존 정책 미흡, 도시계획 위협 등은 ‘위험 요인’으로 분류된다. 종묘 앞 40층 빌딩 난립은 이러한 조건에 해당한다.
서울의 관광과 도시미관에도 부정적이다. 한옥, 성곽, 얕은 산능선과의 조화가 서울의 강점인데, 고층 건물 난립은 이를 훼손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국가유산청과 서울시는 협력해 종묘 시야 보호와 차경 보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문화유산은 단순한 건물이나 풍경이 아니다. 선조들의 철학과 역사, 그리고 세계적인 보편 가치를 담고 있다. 이를 외면한 채 개발과 편의만 강조한다면, 우리는 역사와 미래를 동시에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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