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 박사
sstpnews@gmail.com | 2024-04-08 12:50:09
이후 ‘부적절한 관계’라는 말은 ‘불륜’을 의미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이 일로 클린턴은 국제적 망신을 당했을 뿐더러, 탄핵될 위기에까지 몰렸다. 그의 탄핵 사유는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라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아직 제대로 작동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독재국가였다면 르윈스키는 애초에 폭로하지 못했을 것이며, 폭로했더라도 언론은 보도하지 않았을 것이고 본인은 거짓말쟁이이거나 반국가 선동세력의 사주를 받은 자로 몰렸을 것이다.
2022년 9월, 미국에 간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은 글로벌 펀드 재정공약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바이든의 연설을 들었다.
바이든은 “나는 의회의 파트너들과 협력해 글로벌 펀드에 60억 달러를 더 기부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의 연설이 끝난 뒤 윤 대통령은 외교부 장관 박진 대화하면서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승인 안 해주면 ×××은 쪽팔려서 어떡하나”라고 말했다.
이 장면이 언론사 카메라에 그대로 포착됐다.
미국 대통령의 연설에 대한 평가였다는 대화의 맥락에서나 발음에서나, ×××는 분명 ‘바이든’이었다. 하지만 이 발언 내용이 국내에 알려진 뒤 대통령실 대변인 김은혜는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는 기가 막힌 주장을 내놓았다.
대통령실은 심지어 이 장면을 처음 보도한 MBC 소속 기자들을 해외순방용 전용기에 태우지 않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몽니까지 부렸다.
“사적 대화 과정에서 나온 부적절한 발언”이었다고 해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것조차 부담스러우면 “노 코멘트”로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실은 대통령 한 사람의 체면과 권위를 위해 전 국민을 바보나 청각장애인으로 만들었다.
이후 한국인은 자기 지능과 청각을 인정하는 부류와 자기 기억과 청각을 부인하는 부류로 나뉘었다.
최근 법원은 이 문제와 관련한 재판에서 발언자에게 서면 증언조차 받지 않고 ‘바이든인지 날리면인지 판단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방심위는 MBC에 중징계를 내렸고, ‘바이든’이라고 한 게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반국가세력’ 취급을 받았다. 대통령실이 ‘날리면’이라고 하면 그대로 믿는 자들은 애국자가 아니라 꼭두각시일뿐이다. 남의 말을 스스로 헤아려 들을 줄 알기에 ‘사람’이다.
말의 전후맥락을 따질 지능조차 없는 자들을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 그런데 한국인을 사람과 꼭두각시로 나누는 만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바이든 날리면’ 사태 바로 다음 달인 10월 29일에, 이태원 거리에서 159명이 압사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도시 한복판에서 걷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서는 경찰이 동선을 통제하는 것이 문명국가 사람들의 상식이다. 그때 국가권력은 상식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의 자격’을 갖지 않은 자들과 언론들은 희생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최종 책임자가 대통령인데도, 그 대통령을 비호하려고 애꿎은 희생자들을 ‘놀러 갔다가 죽은 사람들’로 매도했다. 대통령 한 사람의 체면과 권위가 159명의 목숨과 수백 명 유가족들의 통한(痛恨)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자들을 ‘사람’이라고 불러줄 수는 없다.
‘명령에 따라’ 구명조끼도 안 입고 수해 실종자 수색 작업에 투입되었다가 사망한 해병대 채상병 사건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지휘 책임자의 죄를 덮어주려고 대통령실이 압력을 가했다는 의혹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의혹의 당사자로서 공수처 수사 대상이 된 사람을 호주 대사로 내보내기까지 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은 전시성 ‘민생행보’를 하면서 ‘대파 한 단 가격이 875원이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려 지금이 ‘태평성대’인 것처럼 알게 하려는 자들이 누구였는지는 궁금하지도 않다. 그런 자들이 득세한 때는 언제나 난세(亂世)였다.
‘대통령이 물가 모를 수도 있지’는 그나마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물가 수준이 어떤지 모르는 대통령을 비호한답시고 ‘875원은 한 뿌리 가격’이라고 주장하는 자까지 나왔다.
대통령의 숱한 오류와 실수, 무식과 무능을 숨기기 위해 온 국민을 바보, 청각장애인, 반국가세력 취급하는 게 지난 2년간 이 정권과 그 열혈 지지자들이 취해온 일관된 태도였다.
지난 2년간, 자기 머리로 판단하고 자기 귀로 들을 줄 아는 멀쩡한 사람들이 남이 시키는대로 판단하고 남이 시키는대로만 듣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존재들에게 반국가세력이니 바보니 하는 비난을 받아 왔다.
이런 상황에서 ‘공분(公憤)’이 일지 않으면 그건 ‘인간의 공동체’가 아니다.
절망적인 건, 이 나라에 꼭두각시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건, 인간이 꼭두각시와 싸워 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는 여야간의 싸움이 아니다. 이 나라에 인간과 꼭두각시 중 어느 쪽이 더 많은지, 우리 국민이 ‘인간의 자격’을 지키며 살 수 있을지 없을지를 판가름하는 선거다.
[ⓒ 시사타파NEWS. 무단전재-재배포 금지]